홍익희_유대인이야기 88

[홍익희의 흥미진진 경제사] [38]_영국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해상권을 장악하다

◇유대 상인에 목매고 있었던 영국 유럽의 작은 섬나라 영국은 16세기 말까지만 해도 스페인 제국은 물론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에게도 밀리는 변방국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그로부터 200년 후 5대륙 45곳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세계의 통치자가 된다. 사실 영국은 세계무대에 등장하기 전까지 양모와 모직물 수출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산업이 없었다. 그나마 모직물도 14~15세기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백년전쟁이 시작되기 직전 해인 1336년에 에드워드 3세가 모직업을 발전시키려고 플랑드르에서 유대인 직조기술자를 데려온 후에 양모 수출은 쇠퇴하고 모직물 수출이 증가했다. 그 뒤 백년전쟁 중에는 영국이 양모의 수출을 금지했기 때문에 플랑드르의 모직물 산업이 타격을 입었다. 그때 전란을 피해 다수의 플랑드르 직조공들이 영..

[홍익희의 흥미진진 경제사] [37]_영국, 1290년 세계 최초로 유대인을 추방하다

네덜란드가 중상주의의 꽃을 피우고 자본주의의 싹을 키울 때 영국은 후진국이었다. 수출품이라곤 양털과 모직물이 전부였다. 그나마 모험상인이라 불리었던 유대인들이 이 수출을 대행해주었다. 그 다음의 수익원이 해적질이었다. 해적질의 생명은 기동성과 함포 사격술이었다. 이를 통해 길러진 해상 전투력으로 점차 해상권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결국 영국과 네덜란드는 합심해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게 된다. 하지만 해양의 주인이 두 나라일 수는 없었다. 1651년 크롬웰의 항해조례를 계기로 영국과 네덜란드 간에 3차례에 걸친 영란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자. ◇바이킹 출신 정복왕 윌리엄, 영국의 봉건 왕조를 열다 정복왕 윌리엄. /위키피디아 섬나라 영국의 초기 역사는 식민지 ..

[홍익희의 흥미진진 경제사] [36]_유대인들이 주도하는 보석산업

상업적 의미에서 보석의 출생지는 앤트워프와 암스테르담이다. 그리고 그들의 부모는 유대인이다. 한낱 장신구에 지나지 않았던 보석에 생명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석을 보석답게 재탄생시켰다. 이 과정을 살펴보자. 유대인들은 항상 그들이 살던 곳에서 언제 추방될지 모르는 불안 속에 살아왔다. 이 같은 상황에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추방될 때 손쉽게 들고 갈 수 있는 재화였다. 무거운 귀금속보다는 작고 값진 재화나 보석들이 제격이었다. 유대인의 오랜 방랑과 시련이 남겨준 지혜였다. 주화는 편리하고 쓰기도 쉬웠지만 언제 어느 나라로 쫓겨 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각 나라에서 사용하는 주화를 다 모으기는 힘든 실정이었다. 게다가 무겁고 강탈의 위험에 노출되기 쉬웠다. 그러나 보석이란 어느 나라에서나 통하는 만국..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65]래리 서머스의 ‘경제 DNA’_삼촌·외삼촌 모두 노벨상… 美 경제 움직인 ‘서머스 패밀리’

래리 서머스(가운데) 전 하버드 총장이 2007년 6월 7일 미국 매사추세츠주에서 열린 하버드대학교 졸업식에서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빌 게이츠(오른쪽)와 전 NBA 스타 빌 러셀(왼쪽)에게 박수를 받고 있다. 그는 28세에 하버드대학 역사상 가장 젊은 종신교수가 됐고, 38세에는 40세 이하 최고 경제학자에게 주는 클라크 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1년 뒤 그는 재무부에 입성했고, 차관, 부장관을 거쳐 장관까지 지냈다. 2001년 그는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 하버드대학 총장과 오바마 정부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까지 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래리 서머스, 고가의 입시 컨설팅이 통하지 않는 대학 입시 제도 개혁 주문 지난 62년간 이어져 온 미국의 소수 인종 우대 정책이 연방대법원의 위헌 판결로 폐지 수순을 밟게 ..

[홍익희의 흥미진진 경제사] [35]_자본주의 최초의 버블, 튤립 투기

튤립. /위키피디아 자본주의 역사에서 발전만 있을 뿐 퇴보나 재앙이 없었던 자본주의는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 이는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네덜란드에서 금융산업이 발전하면서 자본축적이 커지고 유동성이 증가하자 가장 먼저 나타난 부작용이 투기적 거래였다. 1630년대 네덜란드의 경제적 상황은 투기하기에는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 스페인으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이 사라지고 30년 전쟁으로 강력한 경쟁 산업이었던 동유럽의 직물산업이 붕괴되어 네덜란드 직물산업이 호황을 맞고 있었다. 자카르타 지역을 차지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가는 최고의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그 무렵 유럽 국가 가운데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높았던 네덜란드 사람들은 앞다투어 교외에 대저택을 짓는 등 호황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부동산 가격..

[홍익희의 흥미진진 경제사] [34]_좀바르트와 베버의 논쟁, 자본주의 정신의 유래

◇청교도와 유대교의 궁합 베르너 좀바르트. /위키피디아 ‘근대 자본주의’를 저술한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베르너 좀바르트는 “이베리아반도의 유대인들이 재산을 정리하여 막대한 자본을 가지고 암스테르담에 정착할 때 자본주의도 따라왔다”고 주장한다. 이런 좀바르트가 이렇게 말했다. “미국은 방방곡곡에 유대 정신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미국의 혼’이라는 부르는 것은 순수한 유대 정신에 지나지 않는다. 아메리카의 정신은 퓨리턴(청교도)를 통하여 그리스도교의 가면을 쓴 유대교로 변질되어가는 과정이며 퓨리턴은 인공적인 유대이다.” ‘반유대교’적일 만큼 과격한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크롬웰에 의한 영국의 청교도혁명 이후 영국이 서서히 유대화되었고 드디어는 대영제국의 정책, 나아가서는 세계..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64]현실주의 외교 펼친 키신저의 리더십_당근과 협박으로 사우디 압박… ‘페트로 달러’ 구축한 외교 달인

헨리 키신저가 지난달 20일 자신의 고향인 독일 바이에른주 퓌르트에서 ‘바이에른 막시밀리안 훈장’을 받아 들어 보이고 있다. 키신저는 올해 5월 27일 100번째 생일을 맞았다. /DPA 연합뉴스 헨리 키신저는 1923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유대인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유대인 아이들은 툭하면 길에서 두들겨 맞았다.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였다. 어린 키신저는 학교에서도 청소년 갱단의 폭력에 시달렸다. 반유대주의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의 가족은 키신저가 열다섯 살 때 피난길에 올라 1938년 8월 뉴욕으로 이민을 왔다. 대학살이 시작되기 석 달 전이었다. 그 뒤 키신저는 면도기 공장에서 일하며 야간 고등학교를 다녔다. 이후 뉴욕 시립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다 1943년..

[홍익희의 흥미진진 경제사] [33]_유대인, 대구잡이와 비버 모피 수출에 가담하다

◇청교도가 세운 목사 양성소가 하버드 대학 되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왔던 프로테스탄트들이 미국에 도착하여 올린 기도는 탈애굽을 연상케 한다. “180톤밖에 안 되는 작은 배지만 그 배라도 주심을 감사하며, 평균 시속 2마일로 항해했으나 117일간 계속 전진할 수 있었음을 감사했다. 그러면서 비록 항해 중 두 사람이 죽었으나 한 아이가 태어났음을 감사하였고, 폭풍으로 큰 돛이 부러졌으나 파선되지 않았음을 감사하며 또 여자들 몇 명이 파도에 휩쓸렸지만 모두 구출됨을 감사하였다. 인디언들의 방해로 상륙할 곳을 찾지 못해 한 달 동안 바다에서 표류했지만 결국 호의적인 원주민이 사는 곳에 상륙하게 해 주셔서 감사하고 또한 고통스러운 3개월 반의 항해 도중 단 한 명도 돌아가자는 사..

[홍익희의 흥미진진 경제사] [32]_청교도와 유대인의 신대륙 이주

◇청교도와 유대인, 미국의 건국 정신 만들다 1620년 종교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에 건너온 프로테스탄트들은 이들보다 늦은 1654년부터 이주해 온 유대인을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맞아들였다. 그런 까닭에 유대계 이주민들은 유럽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편안함으로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오랜 방랑 생활에서 본능적으로 익혀온 장사 재능과 자본 증식의 노하우를 마음껏 발휘하며 아메리칸드림을 일구어갔다. 신대륙은 청교도(Puritan)와 유대인에 의해 실용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건국 정신으로 자리 잡았다. 개인의 능력과 지식을 최우선으로 하는 실용주의 문화는 프로테스탄트보다 오히려 유대인에 의해 주도되었다. 유대인들은 물질적인 성공은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임을 증명해 주는 것으로 믿었..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63]패스트푸드에 담긴 유대인들의 애환_영국 국민음식 피시앤드칩스, 도버해협 건너온 유대인들이 시작

1936년 8월 영국 요크셔 리치먼드의 워스길 캠프에 설치된 이동식 가게 앞에 병사들이 피시앤드칩스를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는 모습. 피시앤드칩스는 유대인들의 손에서 시작해 영국의 대표 음식이 됐다. 포르투갈의 유대인이 먹던 ‘바칼라우(대구) 튀김’이 유대인의 이동을 따라 네덜란드로 건너가 ‘키벨링’이 되었으며 영국에서 피시앤드칩스가 된다. /게티이미지코리아 포르투갈의 대표 음식은 ‘바칼라우(대구)’이다. 바칼라우는 365가지의 요리법이 있다고 할 정도로 요리법이 다양하다. 하지만 포르투갈 유대인들은 금요일이 되면 다양한 바칼라우 요리법을 마다하고 항상 바칼라우를 기름에 튀겨 먹었다. 왜 그랬을까? 유대인들은 율법상 안식일에는 일을 할 수 없고 불도 켤 수 없다. 그래서 안식일 전날인 금요일에 미리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