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와 유대인, 미국의 건국 정신 만들다
1620년 종교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에 건너온 프로테스탄트들은 이들보다 늦은 1654년부터 이주해 온 유대인을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맞아들였다. 그런 까닭에 유대계 이주민들은 유럽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편안함으로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오랜 방랑 생활에서 본능적으로 익혀온 장사 재능과 자본 증식의 노하우를 마음껏 발휘하며 아메리칸드림을 일구어갔다.
신대륙은 청교도(Puritan)와 유대인에 의해 실용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건국 정신으로 자리 잡았다. 개인의 능력과 지식을 최우선으로 하는 실용주의 문화는 프로테스탄트보다 오히려 유대인에 의해 주도되었다. 유대인들은 물질적인 성공은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임을 증명해 주는 것으로 믿었다. 다시 말해 재산을 모으는 일은 고귀한 일이었다. 오히려 가난이야말로 삶에 대한 성실성의 결여로 간주 되어 도덕적으로 지탄받아야 할 대상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미국 개척 당시의 청교도들도 마찬가지였다.
유대인이 미국 사회에 급속하게 동화될 수 있었던 것은 청교도 정신이 구약에 뿌리를 두고 있어 유대주의적인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교도는 구약성서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들로서 구약성서에서 신을 찾았다. 때문에 청교도가 영국에서 ‘유대교의 신파’라고 불렸다. 칼뱅주의 신교의 일파인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인 성공회에 대해 극단적인 개혁을 주장했었다. 청교도 지도자들은 ‘지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구약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엄격한 공동체 생활을 하며 도덕적 선을 추구했다.
청교도는 그들의 영국 탈출을 유대인의 애굽 탈출에 견주며 매사추세츠만 연안의 식민지를 새 예루살렘이라고 부르며 유대인들과의 정신적 유대감을 공고히 했다. 이들의 정착 과정을 살펴보자
◇신대륙 초기 이민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할 당시, 이미 북미 대륙에는 인디언들이 약 200만명 정도 살고 있었다. 그들은 주로 조가비 구슬을 장신구 겸 화폐로 쓰고 있었다. 인디언들은 북미보다 중남미에 훨씬 많았다. 그곳에는 약 6000만명 이상이 있었다. 그 뒤 아메리카 대륙은 열강의 각축장이 된다. 중남미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분할 정복했다. 북미 역시 최초의 이민 집단은 1513년 플로리다에 상륙한 스페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1522년 멕시코 지역까지 정복함으로써 주로 미 대륙 남부와 멕시코에 살았다. 지금도 미국 남부는 스페인계 영향이 다분히 남아 있다.
이렇게 스페인 사람들이 개척한 신대륙에 초기 대량이민이 17세기를 전후해 시작되었다. 네덜란드인과 프랑스인들이 정착해 영토에 선을 그었다. 특히 미시시피강 유역에 프랑스계 이민이 많았다. 이들보다 상대적으로 늦게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에 식민지를 건설한 영국은 다른 나라와 달리 정부 주도가 아닌 민간 회사를 통해 이민이 이루어졌다. 정치적 탄압이나 종교적 이유로 이민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생존을 위해 이민을 택한 사람들이었다.

1585년 영국인 106명이 처음으로 민간 회사와 계약을 맺고 신대륙에 왔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민자들이 도착한 곳이 처녀지이고 그녀 자신이 처녀였기 때문에 그곳을 ‘버지니아’(Virginia-처녀)라고 이름 짓게 했다. 그러나 4년 후 다시 찾아가니 초기 이민자들은 모두 병들어 죽고 이후 새로운 이민자들이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을 북미 최초의 정착지로 만들었다. 이민자들은 주로 엔클로우저 운동으로 쫓겨난 농민과 부랑자들, 도시 빈민들로 생계를 찾아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연초 재배로 자립 기반 닦아
1607년 제임스타운에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한 영국 이주자들은 초기에 인디언의 도움으로 연명했다. 인디언들은 그들에게 호박, 콩, 옥수수 등 토착 식물의 재배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후 그들은 인디언들과 평화협정을 맺고 먹고사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 무렵 카리브해 연안과 인근 섬들이 주요한 담배 경작지였다. 1612년에 존 롤프가 그 곳에서 가지고 온 연초 씨앗을 심어 토착 식물과 교배하기 시작하여 유럽인의 취향에 맞는 신품종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 연초의 첫 출하 상품이 1614년 런던에 도착하여 크게 환영받았다. 그로부터 연초는 버지니아의 주 수입원이 되었다. 이로써 자립경제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 뒤 1619년 네덜란드 선박 한 척이 영국 이주자들이 운영하는 담배농장에 최초의 아프리카 흑인들을 싣고 왔다. 이들이 처음부터 노예는 아니었다. 그들은 계약노동자였다.
당시 콜럼버스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유럽에 소개된 담배는 처음에 치료제로 소개되었으나 그 중독성으로 인해 삽시간에 인기를 얻었다. 담배 수입이 이익이 많이 남자 1600년 이래로 영국 황실의 전매사업이 되어 귀족과 부자들의 고급 사치품으로 자리 잡았다. 황실이 재정수입 확대를 위해 귀족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일종의 교양으로 흡연을 권장하고 예법을 가르쳤다는 기록도 있다. 말하자면 담배를 피우면 머리가 명석해지고 인내심이 배양되며, 흡연은 기품 있는 신사가 되기 위해 반드시 배워 두어야 할 교양이라는 식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1612년 맨해튼에 전초 기지 만들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헨리 허드슨은 1609년 맨해튼섬을 발견했다. 161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곳에 전초 기지를 만들었다. 그곳이 지금의 뉴욕이다. 이곳에 네덜란드 사람들이 정착했다. 그 뒤 북아메리카와 교류가 활발해지자 아메리카 항로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서인도회사’가 1619년에 공모되어 1621년에 인가를 받았다. 유대인들은 동인도회사 때와 마찬가지로 서인도회사의 대주주가 되었다.
이렇게 설립된 서인도회사는 신대륙 무역과 식민지 활동을 독점 수행하는 특권회사이자 동시에 은을 싣고 가는 스페인 상선대를 습격하는 해적질도 서슴지 않는 사실상의 전쟁기업이었다. 이 회사는 브라질 북부와 베네수엘라 연안 군도와 기아나를 지배하여 무역기지로 삼으면서 원주민과 모피거래ㆍ노예무역ㆍ사탕수수 등 열대작물 거래에 중점을 두었다.
◇1620년 청교도의 신대륙 이주

최초의 청교도 이주자들(Pilgrims)은 포도주 운반 배인 메이플라워호를 빌려 타고 1620년에 신대륙에 왔는데 이들의 애초 목적지는 버지니아였다. 하지만 폭풍을 만나 그보다 훨씬 북쪽인 매사추세츠에 도착하게 된다. 어느 정부의 관할 구역 안에도 들지 않는 곳에 왔다고 믿은 그들은 그들이 지켜야 할 정식 합의서인 “정당하고 동등한 법”을 그들이 선정한 지도자들로 하여금 기초케 했다. 이것이 ‘메이플라워 서약’이다.
청교도 일행이 겨울에 아무도 없는 매사추세츠에 도착해 먹을 것도 없고 추위 속에 병에 걸려 반이 죽고 50여 명만 살아남았다. 그럼에도 1년 후 메이플라워호가 영국으로 돌아갈 때 전부 신대륙에 남아 공동체를 지켰다. 인디언들은 옥수수 재배법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리하여 이듬해 가을에는 이들은 풍족한 옥수수를 수확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피와 목재의 교역이 늘어났다. 그 뒤 정착민들은 버지니아에서 담배 재배를 통해 소중한 현금을 마련했다. 이들은 불과 5년 만에 자립경제를 이루었다.
◇담배가 법정통화로 지정되다

당시 신대륙에는 고유의 화폐제도가 없을 때라 버지니아에서는 담배가 화폐 구실을 했다. 그 무렵 모국인 영국이 식민지로의 금화 반출을 금지해 통화 부족이 발생했다. 그러자 버지니아 의회는 1642년 아예 담배를 법정통화로 지정했다. 담배만이 유일한 화폐였다. 금화나 은화로 지불하는 행위는 되레 위법이었다. 당시 담배는 연초를 둘둘 말은 잎담배였다.
당시 젊은 여자들이 버지니아 총각들의 배우자로 많이 수입되었다. 처음에 담배 100파운드 가격이었던 여성들은 수요가 급증하자 150파운드로 껑충 뛰었다. 어느 작가는 담배 화폐로 아내를 맞아들이는 남성들의 흥분된 광경을 기록으로 남겼다. “기적소리를 내며 런던으로부터 배가 항구에 도착했다. 배에는 아름답고 정결한 여성들이 타고 있었다. 이들을 기다리던 젊은 남성들은 팔에 최상품 담배를 한 다발씩 들고 급히 배 쪽으로 뛰어갔다.”
법정화폐인 담배 인기가 치솟자 ‘돈’을 심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다. 집집마다 담배를 재배한 탓에 시중에 돈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시중에 담배가 많아지자 담배 구매력은 형편없이 떨어졌다. 과잉 공급을 우려한 버지니아, 메릴랜드, 캐롤라이나 3개 주는 1년간 담배 생산을 중단하자는 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그 뒤에도 담배 폭락세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성난 사람들이 떼를 지어 담배공장을 파괴했다. (출처 담배의 전성시대, 배연국의 돈 블러그)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다
신대륙에 정착한 사람들 가운데 지도층을 이룬 계층은 종교적 박해를 피해 온 이 사람들이었다.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청교도들은 가난하거나 비천한 계급을 극복하고자 신대륙으로 이민온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잘 교육받은 중산층으로 교회 개혁을 선도하던 당시 영국의 개혁 주도 세력이었다. 때문에 신대륙 정착 목적을 그들이 믿는 신앙에 기초한 유토피아 건설에 두고 신세계 건설에 매진했다. 따라서 이들이 영국 식민지 사회의 주도 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청교도들은 의무교육을 제도화하여 모든 신도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안식일은 반드시 준수하도록 했다. 또한 합리적인 사고와 노력에 대한 보상을 확신하는 종교적 믿음을 갖고 인내, 근면, 정직, 성실, 검소하게 살아가는 생활 태도를 견지했다. 그리고 건설적이지 못한 사고나 행동을 죄악시했다.
그러나 청교도의 엄격한 통치를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도층의 권위에 공개적으로 도전하고 나선 최초의 인물은 로저 윌리엄스라는 젊은 목사였다. 그는 매사추세츠 식민지가 인디언의 땅을 빼앗는 것과 그리고 영국교회와의 관계를 반대했다. 그는 결국 매사추세츠만(灣) 식민지로부터 추방당해, 1636년에 지금의 로드아일랜드 프로비덴스에 사는 인디언들로부터 땅을 사 그곳에 정치와 종교가 완전히 분리된 아메리카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후 1650년 무렵에는 영국 이주자들이 대서양 연안 지역에서 지배적인 입지를 구축했다.
◇유대인, 서인도제도에 사탕수수 농장을 만들다
네덜란드 서인도회사에는 포르투갈에 살았던 개종 유대인들이 많이 참여했다. 그들은 서인도회사와 손잡고 대규모로 브라질과 카리브해 지역에서의 사탕수수 농장과 원목 벌채사업에 뛰어들었다. 브라질의 유대인들은 1630년 레시페에서 사탕수수를 본격적으로 재배했다. 그러나 이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645년 포르투갈이 다시 브라질 식민지의 주도권을 잡자 네덜란드는 1654년 1월 레시페를 포르투갈에 양도했다. 그러자 그곳에 살던 유대인 1500명은 서인도제도로 옮겨갔고 일부는 네덜란드로 돌아왔다. 이로써 서인도제도에서 유대인들의 사탕수수 농장이 대규모로 시작되었다.
서인도제도에서 사탕수수가 잘 자라고 이윤을 꽤 남길 수 있는 산업적 전망이 보이자, 유대인들은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실어다 이 지역에 대규모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만들었다. 노예, 담배, 설탕의 삼각무역을 통해 유럽으로 실려 가는 설탕과 럼주의 원료인 당밀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유대인, 1654년 뉴암스테르담 상륙
1624년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는 지금의 뉴욕주 올버니에 ‘뉴네덜란드’를, 그리고 이듬해 맨해튼에 ‘뉴암스테르담’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주로 인디언들로부터 모피를 구입해 이를 수입했다.
유대인들이 처음으로 북아메리카 땅에 발을 디딘 때는 1654년이었다. 브라질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다 북미로 올라온 23명의 유대인들이 배 한 척에 몸을 싣고 처음 도착한 곳이 뉴암스테르담, 지금의 뉴욕이다. 처음에는 네덜란드 서인도회사의 맨해튼 총독이 상륙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네덜란드 서인도회사의 유대인 이사들에게 연락해, 맨해튼 총독은 본사의 훈령을 받고 나서야 상륙을 허가했다.
당시 뉴암스테르담은 750가구의 조그마한 어촌으로, 유대인들은 맨해튼 땅 가운데도 가장 쓸모없이 내팽개쳐진 습지에 자리 잡았다. 이듬해에는 네덜란드에서 유대인 25명이 곧장 뉴 암스테르담으로 건너와 유대인 숫자는 조금 더 불어났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 최대의 유대인 커뮤니티를 이루고 있는 뉴욕의 유대인 사회의 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