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시한조각_신상목 29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33] 뒤통수에도 눈을 달자

젊은 시절 외무고시를 보던 때의 일이다. 일본어 시험을 치르는데 문제 지문의 제목이 ‘後頭にも目を付けよう(뒤통수에도 눈을 달자)’였다. 다소 엉뚱한 제목이어서 고개를 갸우뚱했는데, 내용인즉슨 문을 열고 닫을 때 매너를 지키자는 내용이었다. 스프링 경첩이 달린 현대식 여닫이문은 사용이 편리하지만, 문을 연 후 그냥 놓아버리면 스프링 반동으로 강하게 제자리로 되돌아가면서 뒷사람이 다칠 수도 있으니 문을 이용할 때 뒤를 확인하는 습관을 기르자는 주장을 하면서 눈길을 끌기 위해 ‘뒤통수에도 눈을 달자’라는 제목을 단 것이었다. 중요한 시험에서 접한 글이라 그 내용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는데, 얼마 뒤 누군가가 문을 열고는 그대로 휙 지나가면서 뒤에 있던 지팡이 짚은 노인이 되돌아오는 문에 부딪혀 넘어질 뻔하는 모..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32] 일본의 연말 대청소

이번 월드컵 기간 일본 대표팀이 경기를 마친 후 라커룸을 깨끗이 청소하고 떠났다는 뉴스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일본 응원단이 관중석을 청소하는 장면이 덩달아 해외 토픽을 장식하기도 했다. 워낙 공공장소나 거리 풍경이 깨끗하기로 소문난 청소 선진국 일본이지만, 특히 연말이 되면 나라 전체가 청소로 들썩이는 인상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일본에서는 ‘오미소카(大晦日)’라고 부르는 12월 31일이 한 해를 마무리하는 중요한 세시(歲時)인데, 이즈음에 가장 중요시되는 연례 행사가 바로 대청소다. 하루 날을 잡아 마치 경건한 의식을 치르듯 한 해의 묵은 때를 벗겨내는 대대적인 청소를 하는 것이 각 가정이나 학교, 회사 사무실, 영업장 등의 연말 풍속도다. 일본의 연말 대청소 풍습에는 주술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일..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31] 시부야의 ‘DJ 폴리스’

월드컵 시즌이 되면 각국 거리 응원 모습도 볼거리가 된다. 도쿄는 시부야역 사거리가 응원 명소다. 뉴욕의 타임스 스퀘어를 방불케 하는 이곳에는 ‘시부야 스크램블’로 불리는 X자 횡단보도가 있는데, 며칠 전 일본팀이 독일팀에 깜짝승을 거두었을 때에도 이곳의 응원이 화제가 되었다. 시부야 거리 응원이 인상적인 것은 개미 떼 같은 군중이 파란불이 켜지면 밀물처럼 스크램블로 쏟아져 나와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구호를 외치다가 빨간불로 바뀌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광경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질서정연한 광란’이라는 형용모순적인 상황이 가능한 배경에는 (시민의 질서의식도 한몫하겠지만) ‘DJ 폴리스’로 대표되는 경찰 당국의 효과적인 안내·계도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2001년 아카시(..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30] 사회를 좀먹는 벌레

도교(道敎)에서는 인간의 몸속에 기생하며 인간의 생장(生長)과 건강을 해롭게 하는 벌레가 세 마리 있다고 한다. 이를 ‘삼시(三尸)’라고 하는데, 이들은 서식하는 부위의 병을 일으키고 숙주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여 나쁜 마음을 먹게 만든다. 상시는 두부(頭部)에 자리를 잡아 재물을 탐하게 하고, 중시는 몸통을 떠돌면서 식탐을 돋우며, 하시는 하체에 머물면서 색욕을 불러일으킨다. 삼시는 원전에 따라 삼시구충으로 부르기도 한다. 도교에서는 이들의 폐해를 막기 위해 경신(庚申) 날에 맑은 정신으로 밤을 새우는 ‘수(守)경신’이라는 의식(儀式)을 중요시한다. 이러한 기생충 악행설은 전근대 동아시아인들의 신념 체계에 자리 잡은 전통 속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일본에서는 이러한 속설이 언어 습관으로 이어져서 마음 씀..

[129] 안전한 사회로 가는 좁은 길

이와테(岩手)현의 작은 어촌 후다이무라(普代村)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인명 피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포구 바깥에 정박해 있던 선박은 90% 이상이 파괴되었지만, 포구 안쪽의 주거지는 동북지역 최고 높이의 방파제와 수문 덕분에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인구 2500명 남짓의 작은 마을이 이례적인 수준의 방재 인프라를 갖출 수 있었던 데에는 1947년부터 40년 동안 촌장으로 봉직한 와무라 고토쿠(和村幸得)의 집념이 있었다. 후다이무라에는 1896년과 1933년에 발생한 거대 쓰나미로 수백 명의 인명이 희생되는 비극이 있었다. 청년 시절 쓰나미의 무서움을 체험한 와무라는 수해로부터 안전한 마을을 만드는 것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았고, 그의 집념은 15.5m 높이의 방파제(1967년)..

[128] 성장의 원리 슈·하·리

일본에서는 신체 단련이나 미적 감각을 추구하는 무예 또는 기예에 ‘도(道)’를 붙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는 한다. 다도, 화도(華道), 검도, 공수도 등은 한국에서도 익숙한 사례이다. 이러한 도를 수행(修行)하는 수련인의 마음가짐 또는 성장 단계로 일본에서 흔히 회자되는 격언이 ‘슈·하·리(守·破·離)’이다. ‘슈(守)’란 기존의 모델을 모방하는 단계이다. 좋은 스승과 인연을 맺어 그 가르침을 익히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破)’란 새로운 것을 모색하는 단계이다. 몸에 익힌 가르침의 의미를 곱씹는 한편, 수행자의 주체적 사유와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리(離)’란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모델을 추구하는 단계이다. 기존의 것..

[127] 망가진 국가 시스템의 대가(代價)

1945년 9월 중순, ‘마쿠라자키(枕崎) 태풍’으로 명명된 초대형 태풍이 일본을 강타한다. 쇼와 3대 태풍으로 꼽힐 정도로 기록적인 강풍과 호우를 동반한 이때의 태풍으로 11만 채 이상의 가옥이 전파(全破)되고, 3700명이 넘는 인명이 희생되는 참사가 벌어졌다. 패전 후 혼란에 시름하던 일본에 엎친 데 덮친 격의 시련이었다. 200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는 등 피해가 집중된 히로시마 주민들은 원폭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닥친 대규모 재해에 망연자실했다. 극심한 피해의 배경에는 자연의 가혹함만을 한탄할 수 없는 인재(人災)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기습으로 대미 개전을 감행한 군부는 그다음 날인 8일을 기해 ‘기상관제’를 실시한다. 기상 정보가 공개되어 적의 수중에 ..

[126] 바람을 나타내는 한자

올해는 가을 초입에 대형 태풍으로 나라의 근심이 컸다. 거센 바람의 대명사로 통하는 태풍의 한자는 ‘颱風’이다. 颱는 자전에 ‘태풍 태’로 풀이되어 있을 정도로 태풍 외에는 사용례가 없는 독특한 문자다. 태풍은 사실 그리 오래된 말이 아니다. 근대 이전에는 휘몰아치는 바람을 ‘구풍(颶風)’이라고 불렀다. 태풍이라는 용어가 보급된 것은 1920년대 이후다. 일본의 국가 예보 체계를 설계한 기상학자 오카다 다케마쓰(岡田武松)가 중앙기상대장(지금의 기상청장) 시절 북서태평양 열대성 저기압을 부르는 국제적 명칭인 ‘타이푼(typhoon)’의 어원과 발음을 고려하여 후젠, 타이완 등 남중국의 지역어로 사용되던 颱風(일어 발음 타이후)을 정식 기상용어로 정착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어로 세차게 몰아치는 거센 ..

[125] 한제 외래어 ‘마타도어’

일본에서는 외국에서 온 말이지만 그 뜻이나 형태가 변형되어 일본어에 편입된 외래어를 ‘화제(和製) 외래어’(해당 원어가 영어인 경우에는 ‘화제 영어’)라고 한다. 굳이 말하자면 일종의 귀화어(歸化語)라고 할 수 있다. 애프터서비스, 테이크아웃, 오픈카, 샐러리맨 등 모양새나 쓰임새가 원어와 약간 차이가 나는 정도의 말도 있지만 콘센트, 커닝, 미싱, 샤프, 베드타운, 뉴하프(여장 남성) 등 원어와는 전혀 다르게 변형된 말도 있다. 화제 외래어 중 특이한 사례가 ‘바이킹(バイキング)’이다. 일본에서는 뷔페식 식당을 바이킹이라고 부른다. 본고장 바이킹 후예들이 어리둥절해할 이러한 용례는 1958년 도쿄의 제국호텔에 문을 연 일본 최초의 뷔페식 레스토랑 ‘임페리얼 바이킹’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이 식당은 호..

(124) 졸속(拙速)의 본래 뜻

한국에서 ‘졸속’은 부정적인 단어의 대명사다. 성급하고 졸렬한 일 처리를 비판할 때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졸속의 본래 뜻은 그와는 거리가 있다. 졸속의 출전(出典)은 손자병법 작전편 ‘병문졸속(兵聞拙速) 미도교지구야(未睹巧之久也)’ 문장을 꼽는다. 전쟁은 속전속결이 바람직하며 빼어나게 한답시고 오래 끌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졸속은 미비함이 있더라도 재빠르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남송 시대에 당송 팔대가의 명문장을 모아 편찬한 ‘문장궤범(文章軌範)’의 ‘교지졸속(巧遲拙速)’을 출전으로 소개하기도 한다. ‘교지’는 완벽을 기하되 시간이 걸리는 것을, 졸속은 완성도가 미흡하더라도 신속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 말에도 교지가 졸속만 못하다는 뜻이 담겨있다. 출전에서 볼 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