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_유대인이야기

[홍익희의 흥미진진 경제사] [9] 유대인들, 저지대서 소금 상권 장악... 한자동맹 물리치다유대인의 암스테르담 시대<2>

오늘도해피데이 2023. 1. 16. 11:06
저지대는 스헬데강, 라인강, 뫼즈강의 낮은 삼각주 지대 주변에 위치한 17개 자치주로 이루어진 느슨한 연합체. /위키피디아

저지대는 스헬데강, 라인강, 뫼즈강의 낮은 삼각주 지대 주변에 위치한 17개 자치주로 이루어진 느슨한 연합체로, 합스부르크가의 결혼동맹으로 1516년부터 스페인령이 되었다. 오늘날의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지역 일대이다.

15세기 말 이베리아반도에서 추방당해 저지대에 정착했던 유대인들에게 이 지역은 종교의 자유를 제외하고는 그리 풍요로운 곳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열악한 환경이었다. 저지대는 국토의 4분의 1이 해수면보다 낮아 댐을 쌓아 간척한 땅이었다. 그러다 보니 소금기가 많아 농업과 목축업이 부적합했다.

오죽하면 함께 모여 식사해도 자신이 먹은 거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더치페이’가 발달했겠는가. 16세기 들어 수산업과 염료 산업이 발전하기는 했으나 모직물 산업과 금융 산업이 발달한 플랑드르 지방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지하자원이나 특별한 생산물이 없는 척박한 곳이었다.

1576년 ‘앤트워프 약탈 사건’으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이 이러한 척박한 환경 속에서 상업과 교역을 키워나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 역사를 살펴보면 유대민족은 형극의 역사를 반드시 영광의 역사로 바꾸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즈니스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러한 네덜란드의 생태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노력은 내다 팔 국내 자원이 빈약한 까닭에 더더욱 중계무역에 주목했다.

◇다이아몬드 산업, 암스테르담과 앤트워프가 겨루다

앤트워프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옮겨가자 이번에는 암스테르담이 다이아몬드 유통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앤트워프도 이내 재정비하여 오늘날에는 벨기에의 다이아몬드 수출액이 네덜란드를 앞서고 있다.

이렇듯 오늘날까지도 다이아몬드 산업은 유대인들의 독과점 사업이다. 워낙 이익이 많이 남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주특기인 ‘일괄 독점 체제의 완성’은 이 산업에서도 꽃을 피웠다. 그들은 생산지와 가공지 그리고 판매지의 모든 유통구조를 일괄 장악한 독점 시스템을 이용해 수급을 조절하여 고가의 판매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이는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유통업체인 드비어스의 창시자 세실 로즈의 작품이다. 그는 공급과 수요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만이 다이아몬드 가격을 고가로 묶어 둘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생산과 공급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그 첫 단계로 그는 1888년 드비어스사를 설립하여 판매를 독점했다. 그리고 광산을 사들이기 시작함으로써 공급을 장악하여 단일 채널의 다이아몬드 시장을 구축했다. 이후 20세기 후반에 러시아와 캐나다 등에서 경쟁 생산업체들이 등장했으나 그들 역시 대부분 유대인들로 담합 체제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이는 다이아몬드가 만약에 자유로운 경쟁 체제로 시장에 공급되기 시작하면 하루아침에 돌 값이 될 수 있음을 뜻한다.

◇바이킹의 소금 찾아 삼만리

중세 유럽에서 소금 상권을 장악한 민족이 해상 교역을 주도했다. 8~11세기의 스칸디나비아 지역 바이킹들은 약탈 못지않게 교역에도 힘써 수로를 통한 교역망 개척은 주로 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수심이 얕은 강에서도 탈 수 있는 가늘고 긴 롱십(longship)을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강물이 끊기면 배를 끌거나 둘러메고 다른 수로를 찾아 이동하면서 교역망을 개척했다. 당시는 약탈과 거래가 혼재했던 시기였다.

덴마크 지역 바이킹이 9세기 저지대와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로 내려온 것은 해안가에서 소금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주요 교역품이자 주식인 절임 대구를 염장할 소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발트해는 평균 수심이 55m에 불과한 대륙붕으로 겨울철 결빙 시기에는 해수 증발이 없고 주변 강들에서 흘러나오는 민물로 인해 염도가 낮아 소금 생산이 불가능했다.

노르망디에 내려온 바이킹들이 파리를 자주 습격하자 프랑스 왕은 바이킹의 수장 롤로와 911년 화해 조약을 맺고 그에게 공작의 지위를 주어 아예 노르망디를 내주었다. 이후 바이킹들이 시칠리아 등 지중해로 침공한다. 이 역시 소금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 뒤 롤로의 후손 윌리엄 1세는 1066년 영국을 정복하여 영국 왕가의 시조가 된다. 이로써 정복왕 윌리엄은 영국 왕이자 노르망디 공작의 지위를 겸하게 되어 노르망디 지역은 영국 왕의 영토가 되었다. 이때 윌리엄 왕은 영국의 경제를 활성화하고, 다른 바이킹족들이 영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대규모 요새 겸 성들의 건축 자금 마련하기 위해 프랑스의 유대인들을 영국으로 불러들였다.

◇한자동맹의 번영

한자동맹. /위키피디아

암흑의 중세에 바이킹의 뒤를 이어 경제적 번영을 누리는 곳이 있었다. 그곳은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북유럽 한자동맹의 도시 국가들이었다.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이란 독일 북부 연안과 발트해 연안 도시들 90여 개가 힘을 합쳐 결성한 상업 동맹이자 자체적인 해군을 보유한 무역 공동체를 일컫는 말이다. 이들 상인집단은 14세기 덴마크와의 10년 전쟁에서 승리하여 세력권을 공고히 했다.

한자동맹도 소금 교역을 통해서 번창하기 시작했다. 북해 연안에는 대구를 비롯한 생선이 많이 잡혔다. ‘물 반, 고기 반’이라는 말이 생소하지 않을 정도로 거의 무진장으로 잡혔다. 그러나 생선은 쉽게 상했다. 햇빛에 말려서 건어물로 만들면 장기 보관이 가능했으나, 북유럽은 대체로 흐린 날씨가 연중 이어졌다. 그래서 염장을 하거나 훈제해야 했다.

훈제에는 값비싼 목재가 너무 많이 소요되었고 공급마저 충분치 못했다. 남은 방법은 염장밖에 없었다. 염장은 물론이고 훈제하기 위해서도 소금이 필요했다. 그러나 어장에서 가까운 곳에서는 소금이 많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멀리 발틱해 연안 지역에서 암염 광산이 개발된 이후부터 북해 어장의 생선들이 유럽의 중요 식량자원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자 동맹의 도시들은 소금과 생선의 교역을 통해서 경제적 번영의 토대를 닦았고, 소금과 생선의 교역은 다른 특산품의 교역까지 활발하게 했다.

◇유대인. 소금으로 승부보다

빌렘 벤켈소어. /위키피디아

스칸디나비아 근처 발트해에서 잡히던 청어가 14세기부터는 해류의 변화로 네덜란드 연안 북해로까지 밀려드는 이변이 일어났다. 그러다 1425년경부터는 어장의 중심이 아예 발트해로부터 북해로 이동했다. 네덜란드인들은 너도나도 청어잡이에 나섰다. 그 결과 당시 매년 여름이면 약 1만t의 청어가 잡혔다.

그 무렵 네덜란드는 총인구가 100만 명 정도였는데 고기잡이와 관련된 인구만 30만 명이었다. 거의 전 세대가 청어잡이와 연관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청어잡이는 전 국민의 밥줄이었다. 14세기 중엽 네덜란드의 한 어민 ‘빌렘 벤켈소어’는 선상에서 작은 칼로 한칼에 청어의 배를 갈라 이리를 제외한 내장을 꺼내고 머리를 없앤 다음 바닷물을 85% 증발시킨 함수(鹹水)에 절여 통에 보관하는 염장법을 고안해 냈다. 바다에서 잡은 청어를 잡는 즉시 함수에 절이고 육지에 돌아와서 소금에 절이는 거였다. 이렇게 하면 1년 넘게 보관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의 청어 어업을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그러다 이런 작업을 위해서는 폭넓은 갑판의 배가 필요했다. 그들은 1416년 ‘뷔스(buss)’라는 갑판이 넓은 청어잡이 전문 선박을 개발했다. 적재량은 100t에 달했고, 염장 숙련공은 물론이고 통 만드는 기술자도 동승했다.

네덜란드는 이 두 가지 기술혁신을 통해 주변 경쟁국들을 압도했다. 조업 중에 보급선이 와 소금을 갖다주고 잡은 생선을 가지고 가, 항구로 회항할 필요 없이 계속 조업하면서 염장 작업도 직접 배 위에서 할 수 있게 됐다. 이로써 네덜란드 어선은 청어 이동 경로를 따라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연안까지 종횡무진으로 조업했다. 어장 쟁탈로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는 세 번이나 전쟁을 치렀다.

 

냉장고가 없는 당시에 소금에 절인 청어는 전 유럽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이렇게 청어를 저장하고 수출하는 데에는 소금이 필수품이었다. 절임 청어 원가의 대부분은 청어가 아니라 소금이 차지했다. 당시 식량이 부족하고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보관 기간을 획기적으로 연장시켜준 절임 청어는 전 유럽에서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1년에 140일이 넘는 기독교 육류 금식 기간에도 생선은 먹을 수 있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유럽 각지에서 몰려온 상인 수백 명이 매일 아침 소금에 절인 청어를 유럽 전역으로 가져가 돈을 벌었다. 당시 필요한 소금의 일부는 브뤼헤나 앤트워프를 통해 수입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독일이나 폴란드 암염 광산에서 한자동맹 무역망을 통해 공급받아 왔다.

스페인 왕국에서 추방당해 저지대에 온 유대인들이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청어를 절이는 데 필요한 대량의 ‘소금’이었다. 그 무렵 소금은 비쌌다. 유대인들은 바로 이 점에 착안했다. 그들은 먼저 한자동맹으로부터 공급받는 소금 대신 이베리아반도의 천일염을 수입했다.

천일염이 암염보다 값이 쌀 뿐 아니라 질은 말할 나위 없이 훨씬 더 좋았다. 이로써 유대인들은 청어 절임 소금을 암염에서 천일염으로 서서히 대체해 나갔다. 이는 네덜란드를 소금 중개무역 중심지로 만들어 준 중요한 시초였다. 유대인들은 소금 공급을 토대로 자연스레 절임청어 유통의 독과점 체제를 이룰 수 있었다.

◇유대인, 최초의 천일염 ‘정제 소금’으로 고객을 사로잡다

정제 소금. /위키피디아

그리고 이들은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갔다. 천일염을 다시 한번 ‘정제’할 생각을 한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천일염은 암염보다 순도도 높고 깨끗했다. 그런데도 이를 다시 정제하여 더욱 고운 소금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당시 소비자는 소금의 순도, 모양, 때깔 등 소금의 질에 민감했는데 특히 양질의 음식에 쓰일 소금에는 더 그랬다.

유대인들이 이러한 고객의 요구에 맞춘 것이다. 이 요구에 부응해 역사상 처음으로 거친 소금을 소비자가 원하는 질대로 만드는 소금 정제산업이 유대인에 의해 최초로 발달했다. 유대인들은 대서양 연안 천일염으로 결정이 더 작고 염도가 높은 소금을 만들기 위해 이를 다시 끓여 불순물을 제거하고 증발시켜 순도 높고 고운 결정을 만들었다. 유대인은 이렇게 고객을 만족시켜 돈 버는 법을 알고 있었다.

16세기 중엽에는 총 400개의 대서양 연안 소금정제소에서 4만t의 소금을 생산했다. 이는 당시 저지대 소금 필요량의 절반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그럼에도 이 정제 소금이 멀리 오스트리아나 독일에서 육로로 가져오는 암염보다 쌌다. 한마디로 이베리아반도의 정제 천일염은 대단한 가격 경쟁력과 품질 경쟁력 모두를 갖고 있었다. 이로써 북해 지역이 발트해를 제치고 소금 중계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유대인, 한자동맹을 역사 속에 파묻다

경쟁에서 밀린 한자동맹 도시들의 북해 주도권은 여기서 끝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만큼 소금이 교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 채굴하기도 어렵고 운반도 힘든 독일어권 지역의 암염 대신 유대인들은 양질의 천일염을 정제하여 대량으로 들여와 한자동맹과의 무역전쟁에서 이긴 것이다. 소금이 경제권역 간의 주도권을 바꾼 것이다.

당시 한자동맹이 망한 이유는 또 있었다. 그들은 유대 상인들이 발행하는 환어음을 거부하고 매매 대금으로 현지 화폐만을 고집했다. 그러니 당시 북부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상권을 쥐고 있었던 유대 상인과는 상업이 연계될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소금의 독점적 공급이 깨지고 판매가 줄면서 금융이 꽉 막힌 그들에게 유동성이 줄어들자 급격히 쇠퇴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청어를 절이고 남는 천일염과 정제 소금은 인근국들에 싼값에 되팔아 소금 유통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로써 유대인은 소금의 품질은 높이고 가격은 암염에 비해 낮추어 생산지-유통-소비지 일체를 지배하는 독과점 체제를 이루었다. 유대인들은 유통시킬 국내 자원이 부족하자 이렇게 경쟁력 있는 원자재나 상품의 부가가치를 높여 재수출하는 중계무역을 키워나갔다. 네덜란드의 척박한 환경이 오히려 전화위복이었던 셈이다.

◇환어음 거래 활성화로 상업 활동이 활발해져

고대로부터 상인들이 몸에 귀중품이나 금은 주화를 갖고 다니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 그래서 귀한 상품이나 주화를 운반해야 하는 상인들은 항상 대규모 상단을 구성해 함께 다니면서 용병들을 고용해 그들을 호위케 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위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그들 디아스포라 간 교역에 있어 주화 대신 어음을 사용했다. 어음은 거래 당사자 간에 일정한 시기에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금액을 주겠다고 약속한 증서다. 처음에는 어음 발행자가 채권자에게 직접 지급하는 약속어음이었다.

그런데 앤트워프 유대인들이 어음의 뒷면에 채권의 양도를 기재하는 ‘이서’(裏書)를 함으로써 처음으로 상인들 사이에 서로 이전되고 할인시장에서 유통되기도 했다. 이것이 환어음으로 수표 역할을 했다. 강력하고 거대했던 한자 상인들이 환어음을 받지 않아 망하는 것을 본 유럽 상인들은 유대인들의 환어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환어음이 유통되자 신용거래가 자리 잡고 시중 유동성이 늘어나는 효과를 보여 상업 활동이 활발해졌다.

◇네덜란드의 부, 청어로부터 시작되다

유대인들은 청어 처리에도 일대 혁신을 이루었다. 바로 ‘분업화’를 도입한 것이다. 고기 잡는 사람, 내장 발라내는 사람, 소금에 절여 통에 넣는 사람 등으로 나누어 작업을 진행했다. 숙련공들은 1시간에 약 2천 마리의 청어 내장을 발라냈다. 이로써 절임 청어의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증가했다. 그러자 청어의 포획부터 시작하여 처리와 가공 그리고 수출은 기업화되기 시작했다. 청어 절임이 본격적인 산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후 유대인들은 네덜란드에서 오늘날의 수협 격인 ‘어업위원회’를 만들었다. 동 위원회는 의회로부터 법적인 권리를 부여받아 체계적인 청어 산업을 관리 감독했다. 어업위원회는 품질 관리를 위해 저장용 통의 재질과 소금의 종류, 그물코의 크기를 정했다. 그리고 가공 상품의 중량, 포장 규격 등 엄격한 품질기준을 만들어 네덜란드산 청어가 뛰어난 품질을 지속적으로 지킬 수 있도록 관리했다. 그리고 어획 시기를 한정해 청어 산업의 장기적인 포석과 더불어 공급을 조절하여 청어 산업의 고부가가치화를 이끌었다. 이를 바탕으로 유럽 시장에서 다른 나라에 견주어 우수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관 공정 체계의 완성과 유통의 장악, 그리고 공급 조절 곧 ‘독과점 전략’은 원래 유대인들의 장기였다.

절임청어. /위키피디아

유대인들은 염장 대구가 영국과 프랑스 해군과 상선의 필수품이 되었듯이 네덜란드 해군과 상선 모두에 소금에 절인 청어를 공급했다. 이로써 안정적인 공급처를 확보했다. 그리고 규모의 경제를 살려 절임 청어를 품질이 균일한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만들어 전 유럽에 판매했다.

지금도 네덜란드 사람들은 절임청어, ‘더치 헤링(dutch herring)’을 즐겨 먹는다. 주로 꼬리를 잡고 통째로 먹기도 하고, 양파를 곁들여서 샌드위치로 먹기도 한다. 청어의 비릿한 향과 양파가 조화를 이루면서 은근히 입맛을 당기는 묘한 매력의 국민 음식으로 사랑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