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상식

【뮤지컬 EVITA-에바와 페론의 만남】

오늘도해피데이 2016. 7. 28. 09:11

【뮤지컬 EVITA-에바와 페론의 만남】

짧은 만남, 긴 이별 그러나 영원히 잊혀지지않는 민중의 우상으로서 남아메리카 아르헨티나 현대사를 드라매틱하게 엮어간 두사람! 그들의 이름은 에바(EVA)와 페론(PERON)이다.

에바는 아르헨티나 빈민가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여자의 이름이고 페론은 뒷날 아르헨티나 대통령자리에 까지 올랐다가 쿠테타로 축출되었다가 다시 대통령이 된 남자의 이름이다.

이렇게 보면 극과 극의 양극단에 서 있어야 할 두 남녀가 어느 날 우연한 만남으로 인해 가장 흥미롭고 또 애처로운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되어 지금도 세상사람들의 관심속에 전설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들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삶과 죽음의 괘적은 너무나도 기복이 심해 그것이 곧 일반대중의 흥미와 관심을 유발시키고 있음은 사실이다. 심지어 뮤지컬로 각색되어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장기 공연되는가 하면 최근에는 마돈나라는 여가수가 주역을 맡아 「에비타」란 영화로 만들어져 폭발적인 화재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만하면 에바와 페론의 만남이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되겠지만 그렇다고해서 그들의 삶과 죽음을 언제까지나 유희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었서는 안될 일이다

이제 더 이상 에바와 페론의 이야기가 우리시대의 대중적인 흥미거리가 되어서는 안되며, 또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 좀더 냉철한 시각으로 그들이 살다간 미완의 생애를 통찰하면서 이제는 유희가 아닌 진지함과 애정으로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에바는 에비타란 애칭으로 더 잘 알려진 여성이다. 에비타는 “아르헨티나의 작은 에바”란 뜻인데 그만큼 가냘프고 앳된 몸매로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특히 빈민촌의 서민들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던 여성이었다.

에바는 1919년 아르헨티나의 빈민가 디스카미사이드에서 태어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거주지로 옮긴 것은 그녀의 나이 5살때였다. 그렇게해서 파란많은 에바의 짧고도 긴 인생역정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환락가를 중심으로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에바는 에비타란 그녀의 애칭처럼 작고 귀여운 용모로 나이트클럽에 진출하여 단번에 뭇 사내들의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후 점차 나이가 들어 20대 여인이 되었을 때 에바는 영화나 쇼무대에 상당히 이름이 알려진 스타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러한 에바의 인생항로에 결정적인 전기를 가져다 준 생애 최대의 사건이 1944년 1월에 일어났다. 에바의 이름을 떠올릴 때 반드시 거론되는 페론이라는 군인이자 정치가를 만난 것이다. 쇼무대의 스타와 야심많은 군출신 정치가의 만남, 그것은 어느모로 보나, 세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후안페론은 대단한 야심가였다 그가 24세의 에바를 만나 열정적인 사랑에 빠져들기 시작한 때는 그의 나이 48세였고 부패한 아르헨티나 정권을 무너뜨린 뒤 부통령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 빈민가 뒷골목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에바는 단번에 부통령 페론의 아내가 되어 일약 화재의 인물로 떠오른 것이다.

그러나 2차세계대전이 끝난후 페론은 부통령에서 해임되었다. 독일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것이 해임의 이유였다. 이 때부터 에바의 진가가 발휘되어 페론은 에바를 앞세우고 아르헨티나의 빈민가를 누비며 재기에 열을 올렸다. 가난한 대부분의 사람들이었던 당시 아르헨티나 현실에서 페론과 에바의 적극적인 공략이 곧 먹혀들어 점차 페론에 대한 지지 열풍이 전국을 휩쓸기 시작했다. 그들은 빈민가의 영웅이 되었고 마침내 대통령의 자리에 까지 오르는 영광의 길을 열었다. 그렇게해서 에바는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가 되므로서 극에서 극으로 치닫는 자신의 인생유전을 감회스런 심정으로 되돌아 볼 수 있었다.

에바는 퍼스트레이디위치에 있으면서도 야누스적인 두얼굴을 버리지 않았다. 사치의 절정을 마다하지 않는 한편으로 최빈민가를 즐겨 찿았고 아르헨티나에 여성의 참정권의 기회를 터준 대개혁을 단행하기도 했다.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이 에바의 지나친 사치를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며,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는 여성으로 인식되는 것은 불가사의 한 일이었다.

그러나 1949년말부터 50년대초에 이르러 에바의 몸은 암세포로 점령당하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었다. 1951년 11월 대수술을 받았지만 다음해 7월 6일 에바는 끝내 소생하지 못한채 죽음의 길로 떠나고 말았다.

이때 그녀의 나이 33세, 그토록 사랑했던 아르헨티나의 국민과 페론을 남겨두고 눈을 감은 것이다. 그리고 에바의 시신은 곧 방부처리되어 영원히 썩지않고 생전의 모습을 간직하게 되었다.

1955년 7월 페론정권이 붕괴되고 그는 스페인으로 망명을 떠났다. 그리고 수난은 페론자신에게 그치지않고 죽은 에바의 시신에 까지 덮쳐왔다. 페론을 추출한 군사정권이 에바의 방부처리된 시신을 유럽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에바의 시신은 이태리 밀라노에 안장되어 거기서 16년간 잠들어 있었다.

1972년 페론은 길고도 답답한 망명생활을 끝내고 아르헨티나로 돌아 왔다. 그리고 다음해인 1973년 또다시 대통령령으로 추대되었지만 이미 늙고 병든 페론은 오래지탱하지 못하고 74년에는 에바의 곁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뒤를 이어 대통령에 취임한 이자벨은 페론이 유럽망명지에서 결혼한 부인이었다. 이사벨 대통령은 에바의 시신을 아르헨티나로 옮겨오기로 결정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특설묘지에 유택을 마련했다.

시신으로 유럽을 떠돈지 16년만에 고국땅에 돌아와 묻힌 것이다. 페론역시 이 묘역에 함께묻어 못다한 이승에서의 사랑을 다하도록 배려했다.

전혀 근본이 다른 에바와 페론은 그렇게 만나서 사랑하다고 여기 한곳에 누워 사후의 생명력을 불태워가고 있다

뒷날 영국의 작곡가 워버는 「에비타」란 뮤지컬 대작을 만들어 공저의 히트를 기록했는데 그 뮤지컬 속에는 에바가 부르는 유명한 노래가 한곡 있다.

그 노래의 제목이 「울지마라 아르헨티나여-

Don,t cry for me Argentina」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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