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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鄕 경북, 문학관을 찾아 떠나는 여행 .7 <끝>] 소설가 김주영의 청송 ‘객주문학관’

오늘도해피데이 2016. 12. 6. 11:27

깨알 글씨 육필원고엔 ‘길바닥 문학’의 지독스러움이 담겼다

객주 연재 당시 전국의 장터를 떠돌며 쓴 김주영 작가의 육필 원고. 원고지를 많이 가지고 다니기 불편해 자신의 노트에 원고를 작성했는데, 깨알만 한 글씨로 써 돋보기를 통해 봐야만 알아볼 수 있다.
폐교된 진보 제일고 건물을 증·개축한 객주문학관은 4천640㎡ 규모의 3층 건물로 2014년 개관 이후 청송을 대표하는 명소로 자리잡았다.
김주영의 대하소설 ‘객주’를 이름으로 내건 청송 객주문학관 내부. 작가의 삶과 문학세계는 물론 19세기 말 보부상의 이야기를 그린 대하소설 ‘객주’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갑자기 떠오른다. 붕, 하는 이륙의 느낌이다. 길의 상승은 미리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완곡한 것이었기에 무중력과 같은 일각은 적이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그 부유의 순간에 눈에 들어온 것이 세밭골 버스정류장과 객주문학관이다. 그리 멀지 않은 눈앞에는 진보면이 나지막이 펼쳐져 있었다. 청송읍을 지난 이후 과연 끝이 있을까 싶게 이어지던 길의 일단이 바로 이 순하고도 분명한 언덕이었다.

객주문학관
진보읍 앞둔 고갯마루 폐교 증·개축
작가의 대하소설 ‘객주’ 이름 내걸어
200여개 장터 누비며 쓴 노트 등 전시

진보장터와 반변천
진보면 오지로 꼽히는 달밭마을 출생
유년시절 장터 누비고 반변천서 보내
경이롭고 치열한 삶이 소설의 자양분

#1. 길 위의 작가, 그리고 객주 문학관

청송 진보읍내를 500여m 앞둔 고갯마루에 ‘객주문학관’이 자리한다. 작가 김주영의 대하소설 ‘객주’를 이름으로 내건 문학관이다. 작품을 높임으로써 자연스레 작가를 높이는 겸손한 어법이다. 문학관은 폐교된 고등학교 건물을 고쳐 만들었다. 학교의 형상은 고스란하나 학생들의 소란스러운 패기 대신에 작가의 저회와 같은 고적감이 가득하다. 잔디 깔린 운동장을 에둘러 문학관 입구에 선다. 투명한 유리문 속 햇살 가까운 창가에 다육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다. 살그머니 문을 밀어 찬바람을 다독인다.

홀에는 기념품 코너와 안내데스크가 있고, 작가가 귀히 여긴다는 몇몇 책들이 진열되어 있다. “올라가서 3층부터 보시면 돼요.” 2층으로 오르는 계단 벽에 ‘한중작가회의’의 단체 사진이 걸려 있다. 선이 굵은 김주영 작가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금세 눈에 띈다. 2층 복도에는 중견 화가들의 작품과 ‘객주’ ‘잘가요 엄마’ 등 김주영의 소설을 소재로 그린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3층으로 오르는 계단 벽에는 김주영 작가가 찍은 사진들이 걸려 있다. 시장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흑백 사진들이다. 이어질 공간에 대한 프롤로그같다. 이제 3층이다. ‘여송헌(與松軒)’ 문패가 달린 작가의 집필실 앞을 스쳐 전시실로 향한다.

제1전시실은 ‘김주영 작가실’이다. 사람 좋은 얼굴로 천진하게 웃고 있는 작가의 사진 위에 ‘길 위의 작가, 김주영’이라 적혀 있다. 전시실은 유리벽 속에 재현된 작가의 방을 중심으로 소년, 청년, 객주의 작가, 그리고 현재 진행형인 작가의 면면들로 채워져 있다. 지독히 가난했던 소년의 술회가 있고, 생계를 걱정해야 했던 청년의 사진이 있고, 소설을 위해 장돌뱅이처럼 전국을 돌아다니던 시절 그와 함께했던 카메라와 철필과 노트가 있다.

소설 ‘객주’는 19세기 말의 보부상들, 즉 장돌뱅이들의 이야기다. 그는 ‘장돌뱅이 이야기를 연재하기 위해 스스로 장돌뱅이가 되었다. 객주 연재를 시작하기 전 5년 동안 전국 200여 개 시골 장터를 답사하였으며, 연재 기간에는 한 달에 이십 일 이상 장터를 찾아다니며 현장에서 글을 썼다.’ 그는 상인들과 막걸리를 나누고, 그들과 함께 먹고 자고 이야기하며 떠돌았다. 그렇게 ‘객주’의 한 장 한 장은 ‘길 위에서’ 완성되었다. ‘길 위의 작가’라는 애칭은 그의 행보에서 태어난 것이다. 전시실 한쪽에서 작가가 직접 녹취한 장터사람들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그들의 음성은 그의 걸음이며 그렇게 채집된 우리말 노트가 11권 분량이다. 동선의 끝에 그의 노트가 펼쳐져 있다. 깨알 같은, 정말 깨알만 한 글씨다. 소설가 이문구는 김주영의 노트를 보고 ‘이것은 그의 피다. 피를 흘리는 김주영의 모세혈관’이라고 했다.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벽에는 서울신문에 연재되었던 소설 ‘객주’가 연도별로 나열되어 있다. ‘객주’는 1979년 6월부터 1984년 2월 말까지 4년9개월 동안 1천465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그리고 1984년 9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2013년 다시 연재가 시작되었고, 108회를 끝으로 총 10권의 ‘객주’가 완간되었다. 집필을 시작한 지 34년 만이었다. 군데군데 지면의 자간과 줄 간에 작가의 메모가 빼곡하다. 하나의 단어를 찾기 위해 밤새 사전을 뒤적였다던가. 작가의 지독스러운 철저함에 자괴감이 들다, 갑작스러운 호랑이의 포효에 번쩍 정신을 차린다.

제2전시실인 ‘소설 객주실’은 보이지 않는 호랑이와 함께 시작된다. 내부에는 소설의 인물들과 보부상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다양한 조형물들, 그리고 그들 길 위의 삶과 함께 했던 지게며 멍석, 저울, 사발, 목침, 저고리 등이 전시되어 있다. 출구 벽에는 객들이 남긴 많은 글이 걸려 있다. ‘나무 보러 왔다가 객주에 머문다’는 한 객의 글이 계속 생각난다.

#2. 작가의 고향, 진보

문학관 앞 한길에서 진보 읍내를 내려다본다. 저기 즈음이 장터일 게다. 청송읍에서 진보면으로 이어지는 이 국도는 옛날 보부상들이 걷던 길이다. 장꾼들의 길고 묵묵한 걸음이 마침내 이 완곡한 언덕에 도달했을 때, 그들의 얼굴에는 잠깐 씰룩한 웃음이 돋아났을 것 같다. 지금 이 길은 ‘김주영 객주길’이기도 하다. 정확하게는 파천면 신기리 느티나무에서 출발해 진보면 시량리의 고현저수지까지 15.6㎞다. 긴 길 자처해 걷는 사람들도 이 언덕에서 환호하지 않을까. 번호도 달지 않은 버스가 세밭골 버스정류장 앞에서 읍을 향해 날아간다.

진보면은 작가 김주영의 고향이다. 그는 진보면에서도 오지로 꼽히는 달밭(月田)에서 태어났다. ‘골짜기가 깊고 좁아 달빛이 스며들면 흘러나갈 곳이 없어 달밭이라고 불렀던 작고 궁벽한 마을’이었다. 이후 그는 진보장터 근처로 이사를 한 듯하다. 그곳은 ‘울타리 밖이 장터였고 울타리 안쪽은 우리 집 마당’인 집이었다. 그때는, 지독히도 배고픈 시절이었다 한다.

소년은 낯선 풍경과 낯선 사람들을 찾아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는 버스 정류소에서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먼데 바라보이는 고개를 넘어와서 또다시 고개를 넘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그는 마을의 옹기도막에 숨어들어 늙은이들이 독 짓는 것을 훔쳐보았다. 진흙뭉치가 항아리로 재탄생하는 과정은 충격이었고, 경이였다. 그는 장날마다 학교를 빼먹고 장터를 누볐다. 소년은 낯선 사람, 낯선 물건, 온갖 사투리, 작부와 사기꾼, 사이좋은 흥정과 육두문자에 멱살잡이를 보았고, 온갖 잡화들이 진열되어 있는 난전 모서리에 앉아 도대체 이것은 어디에 소용되는 물건인지, 이 물건을 사가는 사람은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이 물건을 사가야 하는 것인지를 생각했다.

문학관에서 읍을 향해 조금 내려가면 길 양쪽에 저수지가 있다. 오른쪽이 오라비(오누이 상), 왼쪽이 누이동생(오누이 하), 합해서 오누이 저수지다. 오라비 저수지 아래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작가의 기억 속 옹기도막이 여전히 자리한다. 큰길을 건너 읍내로 들어가면 진보면사무소 앞쪽에 지금도 5일마다 장이 열리는 진보장터가 있다. 소년이 살았던 작은 집은 지금 복원중이고 주변으로 주막과 민박 등이 조성되고 있다. 장터 국밥집에는 진보면의 작가 김주영의 작품들이 자랑스레 꽂혀 있다.

읍내의 등 뒤로는 반변천이 흐른다. 영양의 일월산에서 발원한 반변천은 진보면에서 많은 지류를 합하고 동에서 서로 흘러 낙동강으로 간다. 소년 김주영은 여름 내내 이 물가를 떠난 적이 없었다 한다. 그에게 반변천 갈밭 위로 떠오르는 태양과 흘러가는 여울위로 뭉클뭉클 내려앉는 노을은 가슴 시린 감동으로 기억된다. 이러한 무구한 감동과 순결한 경이와 땀 냄새가 푹푹 배어나는 치열한 삶의 모습이 그가 잊지 못하는 고향이다.

그의 소설은 이 모든 고향의 기억 속에서 태어났다. ‘객주’는 길바닥을 떠도는 모든 민초들이 주인공이다. 항상 정의롭고자 하는 인간군이며, 한 사람의 영웅도 없으나 모두가 영웅이다. 작품의 기저에는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권력자가 아니라 평범한 백성들의 근력과 근성”이라는 작가의 확고한 사관이 있다. 일흔을 넘은 작가는 말했다. 전 생에서 ‘진정 부끄러움을 두지 않았던 말은 오직 엄마 그 한 마디뿐’이라고. 삶에서 부끄러움을 두지 않는 일과 역사 속에서 정의롭고자 하는 일은 두 개의 물줄기처럼 하나로 합해진다. 그 근력과 근성으로, 바다로 간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김주영 작가의 고향인 청송군 진보면의 반변천. 유년 시절 작가는 반변천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남다른 상상력을 길렀다. 그때 보고 듣고 깨달은 것들이 문학적 자양분이 되었다고 말한다.
☞여행정보

영천에서 31번 국도를 타고 청송의 남북을 관통해 간다. 진보면은 청송 최북단에 위치한다. 진보읍 500m 전 왼쪽에 객주문학관이 있다. 관람 시간은 하절기(3~10월)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동절기(11~2월)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다.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 및 추석 당일은 휴관한다. 현재는 객주문학관 개관 홍보기간으로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진보읍 방향으로 200m쯤 내려가면 청송 옹기장이 있다. 옹기장 이무남(李茂男) 일가는 5대째 옹기구이를 가업으로 전승하고 있다. 청송에는 옹기굴이 여럿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이곳만 남아있다. 작가 김주영의 생가가 있는 월전리는 시량리 고현지 바로 전이다. 읍내 장터에 있는 작가의 옛집은 복원중이다